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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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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에는 세종실록 10년의 기사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해에도 명나라와의 외교, 특히 사신들로 인해 세종과 조선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신으로 정식 외교관이 아닌 환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어렸을 적에 고려나 조선에서 중국 황실에 바친 남자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물품들을 요구하고, 비싼 값으로 상품을 매매해가며, 자신의 친인척에게 벼슬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조선의 관리에게 매질을 가하는 등 횡포가 막심했습니다.


현재도 '사대외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요.

그 유래가 『맹자孟子』에 나와 있습니다.


惟仁者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 惟智者以小事大,故大王事,句踐事吳。 

오직 어진 자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략- 오직 지혜로운 자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실록공감_공유_세종_10년_오채원연구소공감.pdf


Posted by 오채원

[ 실록공감 05_세종과 고기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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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享生生之樂, 세종실록 24년 1월 7일]

세종과 더불어, ‘나와 다른 당신’과 공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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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많은 분들이 제게 ‘세종 고기덕후설’의 진위에 대해 물어옵니다.

우선, 답은 ‘예’입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의 ‘고기 사랑’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집니다.

“주상(세종)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고 태종이 증언한 이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주변인들은 열심히 고기를 챙기지요.


고기는 맛있기도 하지만, 여러 효용 가치를 내포합니다.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농경사회에서 소는 무척 귀한 존재였습니다.(세종 7년 2월 4일)

국법으로 그 도살과 판매를 관리할 정도였지요.(세종 7년 2월 8일)

또한 닭・꿩・양의 고기는 의원醫員들이 갈증을 멎게 하는 약으로 세종에게 추천한 식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닭은 이어댈 수 없고, 꿩은 사냥해야 하고, 양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등의 이유로, 너무 약이 호사스럽다며 받아들이지 않으셨지요.(세종실록 13년 3월 26일)


옛사람들은 불행한 일을 맞았을 때 삼가는 모습을 보이며, 이러한 고기와 같은 고급 음식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세종도 어머니인 원경왕후(세종실록 2년 8월 29일), 태조의 맏딸 즉 고모인 경신공주(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이복동생인 혜령군(세종 22년 6월 29일), 며느리인 세자빈 권씨(세종 23년 7월 29일) 등 가족 및 친인척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이상 고기 없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함께 일해 온 신료의 초상에도 반드시 3일 간은 소찬을 드셨습니다.(세종실록 8년 3월 25일)


세종은 초상 외에도 이상기후나 흉작을 맞으면, 고기 반찬을 정지시킵니다.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를 언급하며 고기를 드시라 간청하지만, 세종은 이를 강력하게 뿌리칩니다.

이처럼 본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소찬素饌을 고집하지만, “나이 많은 늙은 대신은 하루라도 고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주변인의 섭생을 챙깁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7일)


사랑하는 부인 소헌왕후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본인이 소찬을 드시는 것은 물론, 자녀들에게 묽은 죽만 마시게 하고 5일만에야 비로소 밥을 먹게 하셨던 분이(세종실록 28년 3월 24일), 늙은 신하들에게는 “50세 된 사람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며 고기를 권합니다.(세종실록 28년 3월 28일)


이는 맹자가 한 말과도 맥이 닿는데요.

“50세가 되면 비단 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고, 70세가 되면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 따뜻하지 않고 배부르지 않은 것을 ‘헐벗고 굶주림[동뇌凍餒]’이라 한다.”(『맹자孟子』「진심 상盡心上」)

맹자는 노인을 잘 보살피는 것을 ‘왕도정치王道政治’라는 이상향의 근본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요.

세종 또한 약자가 ‘배부르고 등 따신’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오늘(7/12)이 초복初伏으로, 무더위의 개시를 알리는 절기입니다.

‘보양식을 먹는 날’을 넘어, 노약자의 사망률이 급증하는 시기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고기 덕후’라면, 고기 먹기 힘든 이들의 처지를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다면서요?”

예, 앞서 본 것처럼, 세종에게 ‘고기는 사랑입니다’.


* 참고문헌 :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2. 아시아경제, 2017-07-12,「어르신들 원기회복 위한 초복 삼계탕 봉사」.


(사진 : 아시아경제)


Posted by 오채원

지난 4/18 [실록공감-나와 세종을 실록하다] 시간에 강의했던 내용을 첨부합니다.

재위 1년째 되던 해는 세종이 이제 걸음마를 해나가는 때였습니다.

서슬퍼런 아버지 태종의 주변 정리가 즉위년에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차분하게 업무를 익혀가는 세종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발언을 통해 신하들의 정치적 견해, 사람 됨됨이가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보였지요.

그래서 세종 1년의 열쇠말을 '지인知人'으로 정하였습니다.

맹자는 지인, 즉 '사람의 됨됨이를 아는 법'으로 언어, 표정, 사상에 대한 시비, 선악, 진위, 득실의 변별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세종이 말을 통해 본, 신하에 대한 평가가 실록에 기재될 것입니다.


실록공감_공유_세종_1년_오채원연구소공감.pdf


Posted by 오채원

'분노 없이 정의를 세울 수 없다'는 어떤 분의 말씀.
이는 맹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文王 一怒而安天下"
(성인의 표상 중 하나인 주나라) 문왕은 한 번 노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하였다.
(《맹자孟子》《양혜왕 하梁惠王下》)

Posted by 오채원

(월간 공공정책 2016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을 소개합니다.)


심통밥통(心通-通) - 측은지심, 소통 그리고 공공성


배고픈 누구라도 살을 퍼가는 뒤주

2014년 여름, 나는 쌀통을 보러 전남 구례로 떠났다. 오로지 두어 달 전에 신문에서 본 그 쌀통 하나 때문에 떠났다.

도착한 곳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운조루(雲鳥樓)’로, 조선 영조 때에 낙안(樂安, 현재의 전남 순천) 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 선생이 직접 지은 자택이다. 올해로 240년 된 이 고택은 본래 아흔아홉 칸에서 현재 육십 여 칸으로 축소되었다고는 하나, 나에게는 궁궐로 느껴질 만큼 넓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큰사랑채의 누마루에 오르면 지리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풍광은 당장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가 온 목적은 쌀통을 보는 것이었으니.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눈 레이더를 가동하여 목표물을 탐색했다.

드디어 발견한 ‘타인능해(他人能解)’ 뒤주. ‘(집안 사람 외의)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을 담은 한자 넉 자가 마개에 쓰인 덩치 큰 통나무 뒤주이다. 배고픈 이는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이 댁의 주인장은 큰 집, 그리고 큰 뒤주에 어울리는 큰 마음을 베풀었던 것이다. 덕분에 대대로 며느리들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가 비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숙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관람객들이 보기 쉽도록, 뒤주를 행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길목에 놓아두었지만, 예전에는 사랑채의 헛간 안에 두어, 쌀을 퍼가는 이가 집 안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뒤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옆에 선 필자. 뒤주의 정면 하단에 위치한 마개에는 세로로 ‘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낮은 굴뚝의 의미

타인능해 뒤주 곁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다. “뭐하는 분이요?” 뒤주의 나뭇결을 손으로 쓰다듬고, 뚜껑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내력이 적힌 표지를 찬찬히 읽는 내가 유난스러워 보였나보다. 설명을 붙이기 귀찮아서 학생이라고 답했다. “내가 하나 더 보여드리리다. 따라오쇼.”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처음 본 아저씨를 따라 집의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에서 굴뚝을 찾아보쇼” 아니, 사람을 대청 앞에 세워두고는 굴뚝을 찾으라니.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니 섬돌 밑에 뚫린 벽돌 반만한 구멍을 가리킨다. “내가 문화재 수리하러 전국을 다니는 사람이라 이런 집을 잘 알지. 아가씨가 하도 열심이길래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요.” 알고 보니, 그는 이 고택을 수리하던 중에, 학습 모드인 나를 보고는 보충 학습까지 시켜준 것이었다.


(굴뚝의 높이를 가늠하기 위해 앉은 필자)


예전부터 궁궐의 굴뚝이 낮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땔거리, 먹을거리가 없는 백성들에게 보일세라,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오지 않도록 한 것이라지. 그런데 이렇게 꽁꽁 숨어 있는 굴뚝은 처음 보았다. 불을 땔 때마다 매운 연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거나 마당에 자욱해서, 집 안 사람들이 불편했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모기 등의 날벌레가 자동 퇴치된다는 정도일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보면,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낼”만큼 용맹했다는 운조루의 주인장 류이주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총융사 홍봉한이, 영남의 무인인 류이주가 용기와 힘이 뛰어나서, 일찍이 조령[현재의 문경새재]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냈다고 장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그러자 임금[영조]이 류이주를 대궐로 불러, 조령에서 호랑이를 쫓아낸 상황을 말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에게 병법서를 읽도록 시키고, 등용을 명하였다. [摠戎使洪鳳漢盛言嶺南武人柳爾冑, 勇力絶人, 嘗於鳥嶺以鞭逐虎, 上命爾冑入侍, 使陳鳥嶺逐虎狀, 又使讀兵書, 仍命調用。] (영조실록 31년 2월 2일)


배곯는 이에게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을 배고픔을, 류이주 선생과 그 자손들은 채찍대신 따뜻한 밥으로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닐까? 타인능해 뒤주와 낮은 굴뚝으로 대변되는, 처지가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마음 덕분에, 동학혁명·여순사건·한국전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이 집은 온전했다고 한다. 남을 살리면서 나도 사는 상생의 선순환인 셈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소통

이왕 여행담을 꺼낸 김에,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최근에 강원도 고성(高城)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旺谷)마을에 다녀왔다. 대체로 200여 년 전에 지어진 기와집·초가집 60여 채에 주민들이 조상대대로 거주해오고 있는 이곳에는 한옥교회인 ‘오봉교회’가 있다. 이곳의 입구에 들어서면 나무 음각 십자가를 만날 수 있는데, 땅을 디디고 있어 사람들 가까이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수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30여 년간 이곳에서 목회를 해 오신 장석근 목사님께 이 음각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여쭈었다. “음각이라 내가 십자가가 될 수 있죠.” 우리 일행은 뚫린 십자가 모양에 자신의 몸을 대보았다. “위가 터진 것도 의미가 있어요. 하늘과 통하잖아요.”


(교회 입구에 서 있는 나무 음각 십자가)


주역(周易)의 태(泰)괘를 닮았다. 태괘는 괘상(卦象)이 건하곤상(乾下坤上), 즉 하괘(下卦)가 하늘을 의미하는 건(乾 ☰), 상괘(上卦)가 땅을 의미하는 곤(坤 ☷)으로 구성되어 있다. 땅이 위에, 하늘이 아래에 있으니 제 자리를 잃어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옛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래 하늘의 기인 양기(陽氣)는 위로 올라가는, 그리고 땅의 기인 음기(陰氣)는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이 있다. 하늘을 아래로 두니 위로 올라가려 하고, 땅을 위로 두니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두 기운이 움직이며 교감하고 소통하여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흔히 음과 양을 대립적인 관계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의존적인 상의(相依) 관계이기도 하다. 음이 없으면 양이 있을 수 없고, 또 양이 없으면 음이 있을 수 없다. 음 또는 양의 독립 개체로는 생명의 생성이 불가능하고, 반드시 양자의 감응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치 남성과 여성이 만나야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며, 자석이 N극과 S극의 다른 극끼리 만나면 붙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태괘는 소통·조화·만사형통을 의미하기에 이른다.

또 하나, 괘의 모양을 보아서도 윗부분이 뚫려서, 하늘과 통한다는 의미 또한 갖는다. 이처럼 땅에 뿌리를 박은 오봉교회의 십자가는, 자신과 이질적인 하늘에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목사님과 자연, 철학, 소통 등등에 대한 담소를 나누다가 어느덧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고, 뒷일정을 위해 우리는 교회를 나서야 했다. “줄 건 없고......” 목사님은 교회소식지를 두 장 쥐어주셨다. 얇은 A4용지를 반 접은 소식지는 군데군데 비뚤한 손 글씨가 보이고, 옛날 야학의 ‘가리방 등사기’로 찍은 듯 볼품없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그 흔한 광고는 찾아볼 수 없고, 주로 생명에 대한 글만 띄엄띄엄 실려 있다. 그 중, 기독교 신자가 아닌 내게도 울림이 있는, 내 배를 채울 때마다 배곯는 이웃을 생각할 것을 요청하는 <오봉교회 밥기도>를 적어본다.


한 방울의 물에도

하늘과 땅이 어울려 있고,

한 톨의 낟알에도

온갖 숨결이 담겨 있으니

이 밥을 고마움으로 받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그리며

많은 가운데에서도 알맞게 떠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공손히 먹겠습니다.


이 밥이 우리를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 아멘


밥에 담긴 마음

끼니 걱정하는 이가 줄었다는 요즘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인사한다. “아침 먹었어?”, “밥은 먹고 다니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적당히 해”. 이처럼 우리네 ‘밥’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담겨 있다.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근거로서 “사람에게는 차마 타인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친해 보려고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구해 주지 않는 데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이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아니라, 큰 돌이 우물을 향해 굴러가는 것을 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불쌍한 마음을 가지는 까닭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人皆有不忍人之心。…… 無惻隱之心,非人也。]" (『맹자』 「공손추 상」) 라며 우리 모두에게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력이다. 단순히 측은지심을 갖는 것을 넘어, 실천하려는 의지・용기가 중요한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확충(擴充)’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설명한다. 내게 있는 측은지심을 확충시킬 수 있다면 “온 세상을 지키기에 충분하고, 만약 그것을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자기 부모를 섬기기에도 부족하다[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맹자』 「공손추 상」) 고 했다. 자신의 착한 마음을 발견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또 더 넓게 확장하여 세상에 가득 채우면 내 가정, 이웃, 사회, 천하가 모두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측은지심의 군주 세종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世宗, 1397-1450)은 30여 년간 측은지심을 가지고 서민의 밥을 챙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 되고, 밥은 백성의 하늘[民惟邦本, 食爲民天。]" (세종실록 1년 2월 12일)이라던 그는 재위 기간 중에 “재해와 괴이한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災異之變, 無歲無之。]" (세종실록 7년 6월 23일) 고 한탄할 만큼 거의 매년 농사로 걱정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위 7년 되던 해(1425년)에는 기록적인 가뭄이 들었다. 궁에서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었던 세종은 어느 날 직접 농사 현장으로 나갔다. “이날 행차에 (호위하는 신하들 없이) 단지 당번인 경호원만 거느리고, (임금의 행차에는 꼭 대동하는) 해 가리개[繖]와 부채[扇]를 받치지 않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돌아보다가 “벼농사가 잘 되지 못한 곳을 보면,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리고는 “점심 수라를 들지 않고 돌아왔다[是日之行, 只率入番內禁衛司禁, 勿用繖扇。 見禾稼不盛之處, 必駐馬問於農夫, 不晝膳而還。] (세종실록 7년 7월 1일). 아마도 백성들에 대한 미안함과 측은함이 컸으리라.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세종]이 (경복궁의) 경회루 동쪽에, 쓸모없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춧돌도 쓰지 않고 띠로 덮게 하였으며, 직접 명령하여 장식을 모두 검소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근정전이 아니라 별실에 기거하였는데, 문 밖에 (왕의 불편함을 염려한 보좌진이 준비한) 거적자리가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명한 바가 아닌데, 어찌 이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명한 것이 아니면,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上命於慶會樓東, 以散材作別室二間, 不用柱礎, 覆以茅草粧(飭)〔飾〕 , 悉皆親命, 務令儉素。 至是, 不御正殿而御別室, 見戶外有藁席曰 "非予所命, 何以作此? 自今非予所命, 雖少物勿納于內。] (세종실록 3년 5월 7일)


"전하[세종]께서 가뭄으로 인하여 찬을 줄이신 지가 여태까지 여러 날이라, 신들은 전하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실까 걱정되옵니다[殿下因旱減膳, 于今累日, 臣等恐聖候不調。]" (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이처럼 그는 백성들이 배를 곯으면, 자신의 처소를 초가 같은 곳으로 옮기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것으로, 측은지심을 자신의 삶에 들여왔다. 한편, 세종은 사회에서 배제된 계층인 죄수에게도 측은지심을 베풀었다.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더위가 들기 시작하여, 손을 물에 담그니 더운 기운이 저절로 풀렸다. 이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대, 죄수가 옥에 있으면, 더위가 들기 쉬워서 생명을 잃는 수가 있으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에 놓고 자주 물을 갈아서, 죄수로 하여금 때때로 손을 씻게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전에 이 법이 있었는지 상고하여 아뢰라[予前此不畏暑, 自年前始中暑, 以手弄水, 暑氣自解。 因念罪囚在牢獄, 暑氣易著, 或致殞命, 誠可哀也。 當其暑時, 以盆盛水置獄中, 屢更其水, 使囚人或盥其手, 俾暑氣不得着如何? 前有此法歟? 其考以啓。]"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한여름의 맹렬한 더위 속에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측은히 여기고, 또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마음. 이것이 측은지심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측은지심을 영어로 번역하면 compassion이라고 할 수 있다. 글자를 해체해보면, ‘com(함께) + pass(고통을 겪다·견디다) + ion(명사형 어미)’으로, 다시 조합해서 해석하면 ‘고통을 함께함’의 의미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결국 ‘공감(共感)’이며, 또한 측은지심이 소통의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 동시에 남의 배고픔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을 나는 ‘밥통(-通)’이라 부른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측은지심을 기반으로 한 소통 ‘심통(心通)’인 것이다. 이처럼 소통은 측은지심을 타고, 자기 한 몸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세계를 확장시키는 연결고리가 된다.

Posted by 오채원

고전을 읽다 보면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 '뜬금포'가 종종 등장한다.

그제부터 소화불량에 걸린 부분은 『맹자孟子』「등문공장구 상滕文公章句 上」으로, 성선性善에 대한 맹자의 직접적인 언급이 있어서 자주들 인용하는 구절이다.


滕文公爲世子, 將之楚, 過宋而見孟子. 

등나라 문공이 세자 시절에 초나라로 가려고 송나라를 지나다가 맹자를 만나셨다.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맹자가 인간 본성은 선함을 말하며 말끝마다 요순을 (예로써) 말하셨다.

世子自楚反, 復見孟子. 

세자가 초나라에서 돌아오며 다시 맹자를 만나셨다.

孟子曰, “世子疑吾言乎? 夫道一而已矣.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세자께서는 제 말을 의심하십니까? 무릇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成覵齊景公曰, ‘彼, 丈夫也, 我, 丈夫也, 吾何畏彼哉?’ 

성간이 제나라 경공에게 ‘그도 장부요, 저도 장부인데, 제가 왜 그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라고 하였고, [사람의 가능성은 같다]

顔淵曰, ‘舜, 何人也? 予, 何人也? 有爲者亦若是.

안연이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자 함이 있는 자는 또한 이와 같습니다.’ 라고 하였고, [누구나 분발하면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

公明儀曰, ‘文王, 我師也, 周公豈欺我哉? 

공명의가 ‘문왕이 나의 스승인데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주공께서 ‘(아버지인) 문왕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는데,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 라고 공명의가 말했다.]

今滕, 絶長補短, 將五十里也, 猶可以爲善國. 書曰, ‘若藥不暝眩, 厥疾不瘳.’”

지금 등나라는 이래저래 따지면 사방 50리에 이르니 이만하면 좋은 나라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서경에서 ‘만약 약이 눈을 어둡게 하고, 또 어지럽게 하지 못한다면[명현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병은 낫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점은 우선, 公明儀曰, ‘文王, 我師也, 周公豈欺我哉?’ (위의 줄친 구절) 에 대한 나의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주희도 이색李穡도 나와 견해가 같은 듯하다.


周公師文王 주공은 문왕을 스승이라 했는데 

豈欺公明儀어찌 공명의를 속였으리요? 

(『목은집牧隱集』에 수록된 시 「고풍古風」중)


저 해석에 의하면, 주공은 자기 아버지인 문왕을 자기의 스승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버지와 스승을 동일하게 본 것이 옳은 해석일까?

자신의 멘토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을 보면, 주공이 자신의 아버지를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주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저 구절의 맥락은 무엇이란 말이냐? ㅜ.ㅜ

고전을 읽다 보면, 중간 중간 '얜 왜 등장했지?', '그래서 뭘 얘기하려는 거지?' 갑자기 멍해지는 대목이 나온다.

옛분들은 공부에서 소화시킬 구멍을 만들어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 천천히 드시어요. 체하실까 저어되어 버들잎을 띄웠사옵니다.'


추신. 누구든 맥락 좀 알려주세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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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채원

하윤이 또 말하였다. “한 그릇의 밥을 두 사람이 같이 먹으면 비록 배는 부르지 않더라도 오히려 한 사람이 혼자만 배부른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一簞之食, 二人共食, 雖不能飽, 猶愈於一人獨飽也。]." (태종 15/1/16)


우리의 옛 어른들은 혼자만 배부른 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내 입에 들어가는 양이 줄더라도, 함께 나누는 쪽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일 것이다.

넘쳐나는 여유로움을 일시적으로 맛만 보여준 맹자(孟子(맹자 양혜왕 장구 하편(梁惠王 章句 下篇))의 여민동락과 다르다.

우리식의 여민동락 정신은, 함께하여 어려움도 넘기기에, 본류인 맹자를 넘어섰다.


김득신(金得臣), 성하직리(盛夏織履 여름날의 짚신 삼기)종이에 담채, 18세기, 22.4x27cm, 간송미술관


Posted by 오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