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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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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초의 '한글 의궤'로 평가 받는 정리의궤(整理儀軌)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http://goo.gl/ceinxJ). 실록에는 정리의궤와 관련하여 어떠한 기사가 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경인일보 2016-07-15) 


영의정·예조 판서·장용위 제조·정리소(整理所) 의궤 당상(儀軌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상[정조]이 이르기를, "자궁[모친 혜경궁 홍씨]께서 회갑을 맞는 탄신일이 머지 않으니 아랫사람의 심정으로서는 마냥 기뻐 축하드리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연회나 진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자궁께서 옛날 일을 슬퍼하시어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고 계시니 규례처럼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섭섭하기는 하지만, 만약 진하나 연회와 같은 이름은 붙이지 않고 실제로 축하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일을 행한다면, 내가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나 경사를 축하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양쪽 다 온당하게 되지 않겠는가.마땅히 18일에 치사(致辭)를 직접 올릴 것이며 표리(表裏)와 전문(箋文)도 직접 올리겠다. 그리고 음식 차리는 일도 그날 행할텐데, 찬품(饌品)에 대해서는 일찍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했을 때 정리소(整理所)에서 차려 올렸던 예가 있으니, 이번에도 본영(本營)에서 거행하되 제조(提調)가 잘 살피도록 하라. 자궁의 내·외 친족으로서 이번에 반열에 참여시킬 대상자는 동성(同姓) 10촌(寸)과 이성(異姓) 6촌으로 제한하라. 그러나 홍희영(洪喜榮) 부자는 모당(慕堂)을 받들어 제사올리는 사람인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그들도 자리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정조 19년 6월 7일)



정리주자(整理鑄字)가 완성되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國初)부터 시작하여 태종조(太宗朝) 계미년에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고주본(古註本) 《시(詩)》·《서(書)》·《좌전(左傳)》의 글자를 대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을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세종조(世宗朝) 경자년에는 이천(李蕆) 등에게 명하여 이를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고,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섬밀(纖密)하다는 이유로 경연에 소장하고 있던 《효순사실(孝順事實)》·《위선음즐(爲善陰隲)》 등의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字本)으로 삼아김돈(金墩) 등에게 명하여 20여 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갑인자(甲寅字)인데 이를 사용한 지 3백 년이 되었다. 내가 임진년에 동궁에 있으면서 대조(大朝)에 앙청하여 대내에 있던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 《만병회춘(萬病回春)》 두 책을 내다가 이를 자본으로 삼아 5만 자를 주조하여 보관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이다. 내가 즉위한 원년인 정유년에는 관서백(關西伯)에게 명하여 본조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여 역시 내각(內閣)에 보관하였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동체(銅體)가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주묵(朱墨)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었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자본을 취해서 황양목(黃楊木)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다. 을묘년에는 《정리의궤(整理儀軌)》  《원행정례(園幸定例)》 등의 책을 장차 편찬·인행하려는 계획 아래 명하여 생생자를 자본을 삼아서 구리로 활자를 주조하게 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30여 만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 이름하여 규영(奎瀛) 신부(新府)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정조 20년 3월 17일)

(경인일보 2016-07-15)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경적(經籍) 인쇄는, 국초에 고려의 옛 제도를 따라서 교서관(校書館)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비서성(秘書省)이라고 하였고, 궁예(弓裔) 때에는 금서성(禁書省)이라고 하였으니, 최초에는 궁중에 설치하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종(太宗)3년에 별도로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다 설치하고 고주본(古註本) 《시경》·《서경》·《좌전》을 본으로 구리로 활자를 만들어 전적(典籍)을 널리 인쇄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한 유래이다. 세종조(世宗朝)에는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가 있었고, 문종조(文宗朝)에는 임신자(壬申字)가 있었고, 세조조(世祖朝)에는 을해자(乙亥字)·을유자(乙酉字)가 있었고, 성종조(成宗朝)에는 신묘자(辛卯字)·계유자(癸酉字)가 있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치평요람(治平要覽)》·《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책은 다 궁중에서 인쇄한 것이니, 비부본(秘府本)이라고 불리워지는 본국 초기의 판본들이 다 정밀하고 보기에 편리한 것은 까닭이 있다. 내가 동궁으로 있던 때에 교서관에 명하여 세종조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으니, 바로 《경서정문(經書正文)》의 인본이다. 즉위하던 해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다시 갑인자를 본으로 삼아 15만 자를 더 주조하게 하여 내각에 보관하게 하였으니, 바로 《팔자백선(八子百選)》 및 새로 인쇄한 《경서대전(經書大全)》의 인본이다. 갑인년에 직접주자(朱子)의 편지 백 편을 골라 내각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鑄字)를 가지고 인쇄하여 배포하고자 하여 창경궁에 있는 옛 홍문관을 수리하여 주자를 옮겨놓으라고 명하였었다. 을묘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수연(壽筵)에서 돌아온 후 《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인역(印役)을 설치하여 동으로 30만 자를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먼저 《지희갱재축(志喜賡載軸)》과 전후의 갱재시(賡載詩)를 인쇄하고, 또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내려보내어 인쇄한 후 그 판각을 보관하게 하였다. 올해는 또 정유자로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어정서(御定書)의 간인(刊印)이나 활인(活印)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여기에서 했던 것은 국초부터 정해져 내려오던 법을 내가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명칭은 내가 일찍이 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각신들이 우선 감인소(監印所)라고 불러 왔다." 하고, 이때에 와서 국초에 설치하던 때의 옛날 호칭을 그대로 써서 주자소(鑄字所)라고 부를 것을 명하였다. (정조 20년 12월 15일)



우의정 이시수를 정리의궤청 총리 대신으로 삼았다. (정조 23년 6월 20일)


《정리의궤(整理儀軌)를 교정(校正)한 당상(堂上)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순조 28년 5월 16일)


전교하기를, "《진찬의궤(進饌儀軌)》의 수정은 《을묘 정리 의궤(乙卯整理儀軌)에 의거대로 하라." 하였다. (고종 15년 3월 13일)


Posted by 오채원

이달 중순에 행복화실 그룹전을 연다.
수업 출석만 열심이고, 그림 연습은 헐렁하였기에 감히 전시회에 참여할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시가 수업의 마지막 순서라 생각하니 '유종의 미'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 올출석이다.

스케치하다 버리고 오브제를 바꿔 또 스케치하다 내팽개치기를 반복.
명품관에 근무하는 직원이 마치 자기가 명품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듯, 동료들의 잘 된 그림을 보다 보니 눈이 이마에 올라붙었다.
허접한 내 그림들에 대고 끙끙대기를 며칠.
새로운 오브제를 찾고자 답사 사진들을 둘러보다, 올 봄에 찍은 수원 화성이 눈에 들어왔다.

성의 화려함이 적의 기개를 꺾을 수 있다는 정조의 말씀이 떠올라 끄덕끄덕했던 화성의 자태.
그리고 옛어르신들과 통신하듯 가만히 손을 대보았던 성벽.
감기 탓인지 신나서인지 달아오른 얼굴로 한 번에 그렸다.
완성하고 보니, 못나도 내 새끼다ㅎㅎ

작품명 <화성華城 -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긴다>.
“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병법(兵法)에 상대방의 기를 먼저 꺾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소하(蕭何)는 미앙궁(未央宮)을 크게 지었고, 또 말하기를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루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가 꺾이게 하는 것도 성을 지키는 데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조 17/12/8)





Posted by 오채원

"한 시대에는 인재가 있기 마련이고, 그는 충분히 그 시대의 일을 성취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늘 옛사람들을 우러러보며 지금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없고, 자질이 떨어져서 큰일을 하기에 역부족이라고만 한다. 이 역시 잘못이다. 대개 인재는 구하면 있다. 다만 구별이 쉽지 않고, 다 찾아서 쓰지 못하는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一]

(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卷 178, 일득록得錄 18, 훈어訓語 5)

(일득록은 정조의 개인 문집인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부분으로, 得錄이라는 말 그대로 하루를 반성하고 그날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정조의 일기이다.)


최근에 둘이 함께 길을 걷다가 옆 사람이 천 원짜리 지폐를 줍는 것을 보았다.

처음엔 신기하다가 그 다음엔 당황스럽다가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같은 길을 걸었는데, 나도 두 눈으로 앞을 보았는데, 나는 못 본 것을 내 옆 사람은 보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내게 그 돈을 건넸다ㅎㅎ).

내게는 눈이 달려 있지만, '보는 눈'은 없는 것이다.

나는 눈 뜨고도 얼마나 많은 부, 기회, 사람을 놓쳤을까?


정조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국가와 기업에서는 인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사실, 인재는 있지만, 그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리더가 없는 것 뿐이다.

우리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작은 욕망에 가리워진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다.

눈 씻고 귀 열고 레이다를 촤악 펼치고 주변을 둘러봐야지.

좋은 사람을 찾았다면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것이다.

만약 내 힘만으로 관계의 발전 혹은 개선이 힘들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쟁취한다'는 말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리라.


Posted by 오채원

(세종사랑방에서 발표한 내용. <세종 유통분(流通分 경전의 결론부분으로 기독교의 복음과 유사함)> 시간)



정조실록에 조선시대 글자체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정조 20/12/15).

* 태종 : 주자소(鑄字所)를 궁중에 설치하고 처음으로 글자를 주조. 조선 최초의 구리 활자인 계미자(1403년).

* 세종 : 경자자(庚子字1420년)·갑인자(甲寅字1434년)

* 문종 : 임신자(壬申字1452년)

* 세조 : 을해자(乙亥字1455년)·을유자(乙酉字1465년)

* 성종 : 신묘자(辛卯字=갑진자1484년)·계유자(癸酉字)

* 정조 : 정유자(丁酉字1777년),《정리의궤(整理儀軌)》를 편찬하려고 주조한 정리자(整理字1795년).

 

글자체는 대체로 지은 해의 간지를 따서 명명한다(정리자만 주조의 목적을 밝힌 명명).

현대의 유명 글자체인 안상수체(안상수 디자인), 공한체(공병우, 한재준 디자인)는 일종의 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안상수체를 조선식으로 명명했다면, 세상에 나온 1985년이 을축년(乙丑年)이므로 '을축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공한체는 1989년인 기사년(己巳年)에 지었으니 '기사자'가 되었을 것이다.

 

왜 글자체를 디자인했을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그 뿐일까?

현대식으로 말하면 국민윤리 교과서인《삼강행실三綱行實》반포 교서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세종은 갑인자 주조 3개월 전에《삼강행실》의 인쇄, 반포, 가르치도록 하는 교서를 반포한다.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은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振作)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와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유교문화권의 유토피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종 16/4/27)

 

국가 비전의 실행방법으로 삼강행실을 배포하려 하나 인쇄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기존의 활자체를 보완하여 갑인자를 주조한다.

갑인자는 다음과 같은 획기적인 활자체였다.


"이전에는 겨우 두어 장만 박으면 글자가 옮겨 쏠리고 많이 비뚤어졌는데, 갑인자는 하루에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字體)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세종 16/7/2)

 

세종은 드디어 갑인자 주조 4개월 후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종친(宗親)과 신하들에게 내려 주고, 또 여러 도(道)에 내려주었다." (세종 16/11/24)

 

세종은 왜 글자체를 디자인했을까? 

잘 디자인된 글자체는 글자에 담긴 생각이 책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세상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글을 읽는 행위는 개인과 사회를 성장시킨다. 

궁극적으로 글자 뿐 아니라, 글자체 또한 사람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끈다. 

글자체는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디자이너'만이 디자이너일까? 

우리는 모두 삶을 디자인하고, 다른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을 하는 디자이너이다. 

각자 분야에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디자인을 하자.


* 세종의 인쇄, 책을 통한 교화 노력 

(세종 5/8/2) 통감속편을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6/1/11) 대소 문신에게 주자소에서 인쇄한 《송파방》 한 부씩을 내려 주다

(세종 6/2/14) 주자소에서 인쇄한 《대학대전》 50여 벌을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7/1/17) 주자소에서 인쇄한 장자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9/3/23) 주자소에서 인쇄한 《당률소의》를 중외의 관원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10/9/8)《집성소학》을 주자소에 내려 인쇄하게 하다

(세종 11/3/22)《효경》을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세종 11/5/16)《농사직설》의 서문

(세종 13/5/11)《직지방》·《상한류서》 등의 의학서를 인쇄하여 보급하게 하다

(세종 15/1/4) 황희 등이 새로 편찬한 《경제속육전》을 올리니, 주자소에서 인쇄하기를 명하다

(세종 15/7/18) 병조에서 진법과 진도를 인쇄 반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연습하게 할 것을 아뢰다

(세종 15/10/28)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세종 16/3/5)《태산요록》을 편찬하고 인쇄하여 반포케 하다

(세종 16/6/21) 주자소에서 인행한 노걸대·박통사를 승문원·사역원에 나누어 주다

(세종 16/7/2) 지중추원사 이천에게 주자를 만들어 책을 박도록 하다

(세종 17/10/25) 중국의 서적을 각 고을에 보내다

(세종 18/1/29) 이백의 시집을 5품 이상의 관원에게 나누어 주다

(세종 18/4/4) 주자소로 하여금 역사서를 박아내게 하다

(세종 22/6/26) 주자소에 명하여 《국어》·《음의》를 펴내게 하다

(세종 26/7/1) 예조에서 병서를 베껴서 평안 함길도에 보낼 것을 아뢰다

Posted by 오채원